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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하얼빈 리뷰(현빈 주연, 안중근 장군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책장과 극장 2025. 1. 17.

영화 하얼빈 리뷰(현빈 주연, 안중근 장군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1909년 10월 26일 대한민국 국권을 침탈한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안중근 장군이 하얼빈 역에서 사살합니다. 전 세계에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을 알린 안중근 장군의 투쟁과 인간적인 고뇌를 그린 영화 '하얼빈'을 소개합니다. 

현빈 주연의 영화 하얼빈의 메인 포스터
영화 하얼빈의 메인 포스터

 

영화의 기본 정보

  • 장르 : 드라마, 액션, 누아르, 첩보, 시대극
  •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러닝타임 : 114분
  • 감독 : 우민호 (대표작: '내부자들', '남산의 부장들')
  • 제작비 : 약 300억 원
  • 손익분기점 : 관객 수 650만 명

영화의 출연진

  • 안중근 역 : 현빈
  • 우덕순 역 : 박정민
  • 김상현 역 : 조우진
  • 공부인 역 : 전여빈
  • 모리 다쓰오 역 : 박훈
  • 최재형 역 : 유재명
  • 이창섭 역 : 이동욱
  • 이토 히로부미 역 : 릴리 프랭키
  • 박점출 역 : 정우성 (특별출연)

신야산 전투현장에서 안중근 장군
신야산 전투에서 안중근

 

영화의 줄거리

1908년, 함경북도 신아산에서 안중근이 이끄는 독립군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하지만 안중근이 전쟁 포로를 석방한 결정으로 독립군 내부에 균열이 생깁니다.


1년 후, 안중근과 그의 동지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모여 이토 히로부미 암살 작전을 계획합니다. 그러나 내부 배신으로 작전이 일본군에게 누설되고, 일본군의 추격을 받으며 하얼빈으로 향합니다.


영화는 안중근과 그의 동료들이 하얼빈으로 가는 여정, 그들의 내적 갈등, 그리고 최종적으로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장면까지를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이 과정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유대관계, 그들이 직면한 위험과 고난, 그리고 조국 독립을 위한 그들의 결의가 드라마틱하게 그려집니다.


영화는 단순히 역사적 사건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 독립운동의 치열함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고뇌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우덕순과 김상현의 모습
우덕순과 김상현

 

책장과 극장의 영화평

영화는 어두운 터치로 안중근 장군의 무장 독립투쟁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두운 터치로 촬영한 이유는 아마도 일제 강점기의 어두운 시대상을 나타냄과 동시에 독립운동의 어려움, 어두운 곳에서 일본이 모르게 해야 하는 긴장과 불안함을 나타낸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는 끝까지 어두운 터치를 유지합니다. 아직 광복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화와 실제 이토 히로부미 암살의 차이점은 김상현은 실제 거사에 참가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김상현을 집어넣은 것은 배신자까지도 이해하고 용서하는 안중근 장군의 인류애적인 모습을 그리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 생각입니다.) 실제 거사에는 우덕순과 조도선이 참가합니다. 

 

뮤지컬과 영화 '영웅'에서 안중근의 모습과 현빈의 안중근의 모습은 약간 차이가 있는데 현빈의 안중근은 좀 더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느낌의 안중근을 영화로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논의하는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논의하는 안중근

 

안중근 장군 일대기

  • 안중근 장군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며 총명함을 보였고, 무술에도 능했습니다. 특히 사격에 뛰어나 명사수로 알려졌습니다.
  • 1895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세례명 '토마스'를 받았으며, 신식 학문과 외국어를 배우는 등 개화 사상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 1907년 최재영, 이범윤 등과 대한의군 조직하여 국내 진공작전 추진합니다. 
  • 1908년 함경북도 홍의동, 신아산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 1908년 영산 전투에서 참패 합니다. 참패한 이유 중 하나는 안중근 장군이 포로로 잡힌 일본군을 살려줬기 때문입니다. 안중근 장군은 이토 같은 정치인들의 잘못이지 군인들의 잘못이 아니라며 풀어주게 됩니다. 
    "이들이 그같이 폭행을 자행하는 것은 하느님과 사람을 다 함께 분노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마저 야만적인 행동을 해야 하는가?

    "또한 일본의 4000만 인구를 모두 죽인 다음에 국권을 회복할 계획인가?"
    ---안중근 자서전 <안응칠 역사> 중 -----

    결국 풀려난 포로들에 의해 위치가 노출되면서 참패하게 됩니다. 
  • 1909년 연해주 일대를 돌며 동지들을 규합합니다. 그러나 잘 되지 않자 강한 독립의지를 결의할 조직을 
    결성하기로 결심하고 유명한 동의단지회를 결성합니다. 동의단지회는 안중근과 11명의 동지가 조직한 비밀결사로,  손가락을 자르고 대한독립이라는 글씨를 쓰게 됩니다. 이 장면이 영화나 뮤지컬에 종종 등장하는 그 장면입니다. 
  •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합니다.
    안중근 장군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계획을 측근들에게도 철저히 숨깁니다. 이토 히로부미 처단계획을 함께한 동지는
    생사고락을 함께한 우덕순과 18살의 최연소 동지 유동하입니다. 러시아어를 잘했던 유동하에게는 암살계획을 숨깁니다.  아마도 어린 유동하를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당일날 실제 거사에는 유동하는 빠지고 조도선이라는 
    사람이 추가된다고 합니다. 
  • 채가구역에서 1차 거사팀인 우덕순과 조도선이 대기합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어디서 내릴지 몰랐기 때문임)
  • 2차 거사 :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장군이 대기합니다. 
  • 1차 거사팀은 이토가 채가 구역에서 내리지 않아서 실패하고 러시아 경비병에게 발각됩니다.
  • 안중근 장군은 밤을 새우고 아침 일찍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립니다. 
  • 09:00시 이토가 타고있던 열차가 도착합니다. 당시 일본은 러시아의 경비지원을 거절합니다. 많은 인파가 이토를 환영하는 모습을 계획한 것입니다. 이것이 안중근 의사에게는 천운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 러시아 의장대의 사열을 받으며 이토가 정범들과 함께 내립니다. 순간 안중근 장군은 빠르게 뛰쳐나가 세 발의 총알을 발사합니다. 안중근 장군은 이토를 사살하고 '코레아 우라' 세 번을 외칩니다. 도망치지 않고 스스로 잡히게 됩니다. 
  • 1909년 10월 26일 오전 10시 이토 히로부미 사망
  • 안중근 의사가 도망치지 않은 것은 잡혀서 재판을 통해 재판장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을 폭로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는 자신들의 경호책임도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요구대로 안중근 의사를 일본에 넘겨주고 재판권한도 넘겨주게 됩니다. 일본은 안중근 의사를 사형시키기 위해 하얼빈에서 재판을 하지 않고 일본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뤼순으로 옮겨서 재판하게 됩니다. 
  • 일본은 안중근 의사의 재판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사건이 되어버렸고, 스스로를 문명국이라고 칭하였기 때문에 안중근 의사를 고문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첫 공판에서 안중근 의사는 이토의 죄를 거침없이 비판하자 재판관은 방청객을 퇴장시키고
    비공개 재판으로 전환해 버립니다.
  • 1910년 2월 14일, 일본 재판부는 안중근 장군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그의 유해는 현재까지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유해 발굴을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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